XY 블로그 보드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그 순간만큼은 어렸을 때로 돌아가는 듯하다. 두번째인데도 5년의 공백은 첫 기억을 없앨만큼 긴 시간인가 보다.
19일 오후 4시 45분, 우리 가족은 뜻밖의 제주도 여행을 가게되었다. 21일 아빠의 개학을 앞두고 이틀 동안 갈 곳을 의논 끝에 백암온천으로 정하려 했는데 어쩌다 나온 제주도를 내가 적극적으로 밀어서(?) 이틀 동안 가게 된 것이다. 6년 전 당일치기 제주도 여행 때와 달리 하루가 더 늘어난 일정에 한라산도 등반하고 카니발을 렌트해서 차에서 자보기로 계획아닌 계획을 세워가지고 출발했다.
가자고 떼를 써서 가게 된 제주도였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실감이 나지 않았고 스타렉스를 렌트하고 나서야 제주도에 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스타렉스 같은 승합차를 처음 내 차처럼 쓰며 제주공항을 출발하는데 벌써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일단 무조건 서쪽의 한림공원으로 차를 몰아갔는데 이를 어쩐다. 도착해보니 이미 날은 저물고 담장 너머 어둠 속에 한림공원이 잠자고 있었다. 늦은 출발로 첫날을 공쳤지만 그래도 끼니는 제주도 먹거리로 해결해야하지 않겠는가? 다시 오던 길을 돌아 제주시에서 유명한 흑돼지 전문 음식점을 찾아갔다. 흑돼지모둠(삼겹살/목살)을 2인분 시켜 먹어보니 맛이 그런대로 좋아 2인분을 추가하고 후식으로 비빔냉면 서비스까지 먹었더니 내 자신이 먹으러 제주도에 온 것처럼 느껴졌다.
잠을 자러 한라산 동쪽 성판악 휴게소에 가보았지만 어둠만 깔려있어 할 수 없이 서귀포 시청 주차장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시청 주차장에서 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웃음이 나오지만 경찰서 주차장에서 자려고까지 했던 생각을 하면 약과였다.
20일 오전 8시에 일등으로 천지연 폭포를 감상한 우리 가족은 하이라이트인 수심 40m의 잠수함 관광에 나섰다. 그런데 이 어찌 기구한 운명인지 외국인 두 명이 우리 바로 옆에 앉는 것이었다. 나에겐 불행이요, 나의 머리에겐 행운이었다. 그냥 모른척 하면 좋았을 것을 아빠, 엄마의 독촉을 견뎌내고 있었지만 아빠의 body language를 보며 모른척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온 나라와 다음 여행지 등을 물어보다가 같이 천제연 폭포까지 가게 되었다. 바다로 흘러드는 천제연 폭포. 그 아래에서 나는 때 아닌 영어 회화를 생각해내느라 경치를 감상할 수가 없었다. 걸매생태공원에 내려주며 원어민과 대화 해프닝이 일단락 되었지만 약간의 아쉬움이 드는 것은 순리인가 보다.
이제 밑창이 닳은 낡은 운동화, 얇은 잠바, 등산용품은 하나도 챙겨오지 않은 우리 가족이 한라산 등반을 조금이나마 하려고 한라산 입장을 시도했다. 역사적인 순간! 입장이 제지되었다. 한라산은 낮 12시 이후에는 등반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때 시간이 13시. 결국 이번에도 한라산은 먼 곳에서 바라만 보는 것으로 만족을 해야했다.
그 아쉬움을 제주도의 봄날 같은 날씨와 구름이 수놓은 하늘, 자연풍경 속에 드라이브하는 것으로 달래고 집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는데... 여기서 마지막 반전이 일어났다. 급하게 예약하는 바람에 한성항공의 비행기를 예매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 한성항공은 처음부터 불안했던 것이다. 무슨 비행기를 수속을 밟고 비좁은 버스를 타고 가 타다니! 그래도 프로펠러가 바깥으로 나와있는 경비행기형이라 이해를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그 비행기는 경운기 10대 분량의 소음을 내며 비행을 했고 그 와중에 승무원들은 활짝 웃으며 우리들에게 귀마개를 권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불평을 하기 보다 내 귀의 건강을 더 걱정해야했던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다.
6년 전 당일치기 여행과 이번 이틀 여행으로 제주도라는 음식의 부메뉴들을 모두 맛보았고 이제 배를 타고 제주도에 가서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한라산을 등반하는 것이 남았다는 것이 이 여행의 마지막 순간에 나를 위로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