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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께...

봄날 저녁의 쌀쌀한 기운을 느끼며 부모님의 안녕을 걱정하는 것이 단지 감상에 젖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진심어린 내면에서 발한 것이라 믿고 편지를 드립니다.

이 편지를 받아보시면서 평소에 전화도 하고 한창 공부할 때 이 무슨 헛된 것이냐고 질책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너의 마음 다 알고 있다고 하시겠죠.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며 지난 19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맞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화려한 선물이나 미사여구로 치장된 글이어도 마음이 결여된 것은 길바닥의 수많은 돌멩이들 중 하나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정으로 부모님에 대한 수많은 사랑을 잇는 것은 마음을 부끄러움 뒤에 숨기고 알아주기만을 바랄 때가 아니라 좋고 싫음의 마음을 티끌하나 남기지 않고 드러낼 때 비로소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세월동안 알아주기만을 바래왔던 마음들을 한 줄 한 줄에 담아가려 합니다.

새삼스럽지만 요즈음 전화처럼 길게 생각하지 못하고 말해야 하는 것 대신에 저 깊은 곳에 숨겨왔던 하찮은 마음까지도 생각해 내서 담을 수 있는 편지라는 것에 고마움이 느껴지는군요. 단편적인 기억들이지만 먼저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우리 가족의 삶이 떠오릅니다. 많이 아팠던 것 같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건강하고 너무 활발해서 문제였을 터이지만 저는 그러기에는 너무나 자주 아팠지요. 혼자 집에서 책을 읽었던 그 때가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음을 생각한다면 세상에 절망만을 주는 불행은 없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 때 부모님의 심정을 생각해 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시끄러운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데 다행히 다른 아이들과 달리 조용해서 키우기 편했다고 애써 말씀하시지요. 그러나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아주 어렸을 때 중이염 때문에 수술을 여러 번 했을 때 전신 마취가 풀리고 눈을 뜨면 희미한 시야에 들어오던 부모님의 모습입니다. 어렸을 때 기억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잊혀지는데 왜 이 기억만큼은 아닐까요? 아마도 죽을 때까지 부모님에 대한 저의 짐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커가면서 많이 건강해졌어도 어디가 아프거나 다치면 최대한 숨기고 싶은 충동이 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초등학교 6년도 이런 생각에 묶여 지낸 것 같습니다. 6년 동안 엄마와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 쓰고 아이들과 많이 놀지도 못했지만 그 아쉬움을 운동장 한구석에 묻어버렸습니다. 아이들과 밖에서 맘껏 못 놀게 하신 것도 밖에만 나가면 감기에 걸리고 중이염이 재발되면 청력에 문제가 올까봐 그것을 걱정하셨던 것이지요. 겉으로는 제가 아프면 병원에 데려갈 사람이 없다고만 질책하셨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뒤에 담긴 부모님의 마음이 제게 다가와 더욱 더 또렷해집니다. 하지만 왜 그랬던 것일까요? 초등학교 때 보다 더 나이든 중학교 시절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사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혼자서 변명해 봅니다.

대충 짐작은 하시겠지만 중학교 3년 동안 가장 많이 부모님을 원망했었을 겁니다. 많은 제약이 있기는 했지요. 머리도 하고싶은 대로 기르지 못하고 항상 짧게 잘라야 했고 초등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방과 후에 아이들과 잘 놀지도 못했지요. 교복도 다른 아이들처럼 딱 맞게 줄여 입고 싶었지만 그것도 안된다고 하셨지요. 그때는 그런 것들이 모두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되어 쌓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중3 가출로 이어졌지요.

그 날 아침에도 3년 동안 똑같은 레퍼토리의 다툼을 엄마와 했던 것 같습니다. 집에서 나와 학교에 가면서 갑자기 부모님이 보기 싫고 집에서 나와 하고 싶은 것들을 맘껏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터미널로 가 대전 가는 버스를 타고 갔습니다. 그리고 대전 터미널에서 내려 4시간 동안 도로변을 걸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좁은 땅이지만 대전과 천안 사이의 간극은 저를 태평양 한가운데 무인도에 떨어뜨려 놓은 기분을 느끼게 했습니다. 하고 싶었던 것들은 지평선 저 너머로 사라진지 오래였고 자기 합리화와 죄책감 후회가 짧으면 짧고 길면 길다고 할 수 있는 4시간 동안 이어진 것입니다. 결국 그날 밤에 천안으로 돌아와 영화를 보고 나오다 차를 타고 저를 찾던 부모님과 만났었지요.

그 때 처음 들은 말이 생각납니다. 밤 1시가 넘었을 때였는데 저를 질타하시기는커녕 첫마디가 밥은 먹었느냐는 물음이셨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그 때까지 흘린 눈물보다 더 많이 울고 그 어느 때 보다 감정이 북받치면서 부모님에 대한 미움이 사라진 것을 보면 그런 감정들은 역시나 거짓된 감정이었다는 게 분명합니다. 한창 때 사춘기의 장난이었겠지요. 비록 그날은 하지 못했지만 그 때는 저의 거짓된 감정들이었고 실은 부모님을 정말 사랑하고 있었음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 후에도 완전히 철이 들지는 못했지만 고등학교를 이 곳으로 오면서 부모님과 떨어져 있게 되자 비로소 철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도 혼자 있고 싶었던 저였지만 막상 부모님과 떨어지게 되자 공부가 안될 때는 엄마의 잔소리도 듣고 싶고 고민이 있을 때는 아빠의 말도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주말에 막상 부모님이 오시면 일부러 밝은 모습으로 가려고 노력했고 ‘보고싶었다’나 ‘사랑합니다’라는 짧은 말 한마디라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매번 성적이 나오지 않음을 한탄하고 ‘사랑합니다’같은 말은 안해도 아시겠지라고 혼자 합리화하여 그냥 교실로 들어오곤 했습니다.

지금도 사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다음에 부모님이 오시면 막상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모두 다는 아니지만 저의 진실한 마음을 알려드렸으니 제 마음을 조금이나마 더 잘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세상에서 그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함을 말입니다. 또한 제비꽃은 제비꽃답게 피면되듯이 저도 아들답게 하나밖에 없는 아들답게 부모님의 자랑스런 아들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